몽토방, Jerosme Legier에서 출판, 파리의 Claide-Jean-Baptiste Herissant가 판매, s.d. [1752].
소형 12판, (8) 페이지, 556 페이지, (1) 페이지. 갈색 가죽, 판 주위에 냉각선, 꽃문양이 장식된 신경등, 장식된 컷, 얼룩 문양이 있는 테두리. 시대의 제본.
162 x 91 mm.
카르디날 리슐리외의 조카인 아기용 공작부인의 후원 하에 디에프의 병원 수녀들이 퀘벡에서 최초의 병원을 설립한 이야기를 전하는 연대기 원본.
바르비에, II, 686.
1629년 커크 형제가 퀘벡을 점령한 후 신프랑스에서 추방된 예수회는 성 제르맹 앙 레아 조약(1632)이 프랑스에 식민지를 돌려준 후 3년 만에 다시 돌아오고, 한동안 ‘캐나다 교회는 선교사 교회’가 되었으며, 그 선두에는 폴 르 주느 신부가 있었다. 그는 1634년에 원주민과 소수의 식민지가 필요로 하는 병원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특히 원주민들을 염두에 두고 르 주느 신부는 퀘벡에 병원 수녀들의 오기를 요청했다. “여기에 병원이 있다면 이 나라의 모든 환자들이 있을 것이고, 모든 노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남성을 위해 우리 능력 내에서 도움을 주겠지만, 여성들은 우리 집에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고 적었다. 바라는 것은 프랑스인보다는 오히려 원주민들에게, “큰 병에 걸리며, 극심한 고통을 경감할 수단이 없는 특히 그들의 극심한 노령에 시달리는” 것들이었다.
« L’élan mystique qui traverse la France dans les premières décennies du XVIIe 다양한 수도원과 수녀들의 많은 관심을 끌 것에는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퀘벡에 수녀들을 정착시키고 수도원 병원을 건설할 물질적 조건은 거의 없다. 르 주느 신부는 다시금 재정적으로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향해 호소를 했다. 그 대답은 프랑스 궁정에서 나왔다.
카르디날 리슐리외의 뜻에 따라 16세에 콩발레트 후작과 결혼하고, 18세에 미망인이 된 아기용 공작부인은 재혼하지 않았고 자신의 거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자선 시설을 설립하는 데 사용했다. 31세에 이미 그러한 목적에 매우 헌신하고 있었다. 파리의 대병원을 설립하는 주요 창립자였다고 역사가 앙리-레이몽 카스그랭을 통해 상기시키고 있다.
수많은 자선 사업의 촉진자이자 개시자인 성 빈첸시오 드 폴의 영적 지도 아래, 특히 1635년 르 주느 신부의 관계에서, 공작부인은 교회의 역사에서의 캐나다 선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1636년에 아기용 공작부인은 “자신의 비용으로 병원 설립을 결심했다”. 이 야심 찬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해 그녀는 디에프 수도원에 주둔 중인 성 아우구스틴 수도원의 병원 자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의 삼촌인 카르디날 리슐리외는 이 좋은 일에 참여하고 싶어 했고, 두 사람은 종신까지 이 집에 특별한 애정을 지녔으며, 소유했던 소이스사스 마차와 코치에서 20000 라이프의 자본에 대해 연간 1500 라이프를 제공했다. 계약은 1637년 8월 16일에 체결되었다.”
Le Dr 이브 모랭은 “네 가지 요인의 조합“이 공작부인이 그녀의 사업을 실행하도록 이끈 것이라고 설명한다. “(…) 공작부인의 자선 정신, 그녀의 삼촌인 카르디날 리슐리외를 통해 궁정에서의 영향력, 예수회를 통해 얻은 신프랑스에 대한 지식, 프랑스의 주요 시설 중 하나였던 디에프 병원의 본질적 역할“.
1639년 4월, 루이 13세 왕은 병원 설립을 위한 특허장을 발행하고, 공작부인의 종교적 동기를 명시한다. 1640년에는 이와 같은 동기가 명시된 두 번째 계약이 있을 것이다. 퀘벡으로 떠나기 전날 마리 겔레 드 생이냐스, 퀘벡 병원의 첫 감독에게 공작부인은 분명히 썼다. “병원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과 귀중한 피에 바쳐져야 하며, 이는 모든 인류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흘려진 것이며, 이는 마님 리슐리외와 아기용 공작부인의 영혼과 이 가난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
공작부인은 센트-어소시에이션즈 회사를 통해 퀘벡에서 건물을 시작한 곳 내에 7 에이커의 콘세션을 받고, 교외에 60 에이커의 영지, 즉 캡 루즈와 생 제네비브 언덕 사이, 생 마리로 알려진 이 땅을 받는다.
세 명의 수녀 안나 르 쿠인트르 드 세인트 버나드(28세), 마리 포레스티어 드 세인트 보나벤처 드 제수스(22세), 마리 게넷 드 생 이냐스(29세)는 퀘벡 병원의 첫 감독이 될 것이며 1639년 5월 4일 디에프 수도원을 떠나 퀘벡으로 가기 위하여 가족과 친구들을 떠난다.
“1739년부터 1779년 사이, 라투르는 큰 양의 설교, 판열식, 교리적 연설, 전례 보고서, 정식 보고서 등을 출판했다. 캐나다를 떠나면서, 그는 잔-프랑수아시 주크레 부인 드 생이냐스가 쓴 ‘퀘벡 병원 연대기’의 필사본을 가지고 갔고, 1752년 몽토반에서 ‘퀘벡 병원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이 텍스트를 출판했다.”
« 자신의 『퀘벡 병원 이야기』의 출처에 관한 설명문에서 몬트리올, C. O. 보슈멘 & 아들 출판, 제4권, p. 11, 역사가 앙리-레이몽 카스그랑(Henri-Raymond Casgrain)은 마리 졸레르 드 생타냐스(Marie Juchereau de Saint-Ignace)의 『퀘벡 병원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 « 이 이야기는 마리 (Marie Guenet) 드 생타냐스에 관한 정보에 근거하여 작성되었으며, 생테헬렌(Marie de Sainte-Hélène)의 어머니에 의해 작성되었습니다. 퀘벡의 교수단의 학장인 라투르(M. de La Tour)에게 제공된 이 연대기의 사본은 1731년에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퀘벡 공동체의 알림 없이 인쇄하도록 했습니다. 이 인쇄는 주의 깊지 않게 이루어졌고, 이 작품에는 많은 오자가 삽입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퀘벡 병원에는 아직도 생테헬렌(Marie-André Duplessis)의 실제 손으로 작성된 원본이 있으며, 생테헬렌(Marie-André Duplessis)과 생타냐스(Jeanne-Françoise Juchereau de Saint-Ignace)의 서명이 있습니다. 이 연대기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중한 역사적 문서 중 하나입니다. 」 Jeanne-Françoise Jucheron의 글은 『퀘벡 병원의 연대기, 1636-1716』이라는 제목으로 알베르 자메(Dom Albert Jamet)에 의해 1939년 퀘벡에서 재출판되었습니다. »
당시의 제본 상태로 보존된 이 희귀한 캐나다 기록물의 귀중한 사본.